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삶이 없으면 죽음 또한 없다.
삶과 죽음의 관계를 굳이 비유한다면 물체와 그림자에 비유해 볼 수도 있겠다.
물체엔 반드시 그림자가 있고 그림자가 없는 물체는 없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빛이 없으면 그림자가 보이지 않지만 그림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이다.
온전한 전체를 百으로 볼 때 삶과 죽음 또는 물체와 그림자의 合이 白이 된다. 삶이 九十이 되면
죽음이 拾이 되고, 삶이 拾이 되면 죽음이 九十이 된다. 그리하여 合이 百이 되어 온전한 전체
바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렇게 보여 진다는 것이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다시금 살펴보면 삶과 죽음이 마주 보기도 하고 등을 대고 돌아서기도 하며 어깨를 나란히 하며 같은 방향을 보기도 한다.
삶이 서면 죽음이 그림자처럼 눕고, 죽음이 서면 삶이 눕는다.
삶의 意志가 강하면 마치 빛이 없는 것처럼 죽음이 감춰지고 죽음의 의지가 강하면 삶 또한 죽음
뒤로 감춰지게 된다.
삶과 죽음을 얘기한 것은 인간의 觀念과 세상의 理致가 相對的인 것이라서 그 代表格으로 삶과
죽음을 擧論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며 나눠질 수도 합쳐질 수도 없는 한 얼굴의 다양한 表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함은 또 어떨까.
상대적인 모든 것(事物과 思想 等을 총망라한 포괄적인 의미)은 相對的이라는 그 자체적인
결함으로 항시 모순에 직면하고 끝없는 논쟁과 시비를 일삼지만 그 어느 것도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상대적인 것은 잠시도 쉬지 않고 變하고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絶對的인 眞理를 갈망하지만 “絶對的 眞理,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것
또한 “相對的이고 변하는 것”에 대한 相對的 비유일 뿐이다.
그리하여 말과 생각을 넘어선 그 어떤 것을 言語道斷이요 不立文字라 하며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說하였고 모든 것을 說하였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일까.
단지 언어의 유희인가. 말과 생각을 넘어선다 할 때 “넘어선다”는 그 자체에 이미 이쪽과 저쪽
으로 갈리는 상대적인 의미를 지울 수 없다. 돌이켜보면 그러한 진리란 것은 또 다른 한 極端이
아닐까 한다.
그리하여 이렇게 얼버무려 본다.
진리도 허구도 둘이 아니요 하나이며 단지 무궁한 造化일 뿐이다.
모든 상대적인 것은 각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의 표정에 지나지 않을 뿐.
變化가 無窮한 쉼 없는 흐름속의 지극한 찰라가 아닐까 한다. 이러한 표현 또한 상대적이란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어찌할거나. 진리에 목마르고 앎에는 한계가 있으니.
안다 모른다를 떠나 오롯이 存在함으로써, 존재한다거나 존재치 않는다는 것을 떠난
無心함만이 그러할까.
아! 무심이란 것 또한 상대적인 것이 아닌가.
이러하니 先覺者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음이던가.
보이는 세상에 보이지 않는 天國과 極樂의 꽃비가 내리니 오롯이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無限한 찰라요, 瞬間的인 永遠함으로 있고 없음이 하나로 버무려진 꽉 차서 오히려 텅
비어버린 “一卽多 多卽一”이여!
(2010. 9. 28 화)